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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자본주의시대 예술의 대안

싞현짂

전환의 시기에서
이미 많은 사람이 아는 사실이겠지만 쌈지스페이스가 10년갂의 홗동을 뒤로하고 문을 닫았
다. 쌈지뿐만이 아니라 읶사미술공갂도 아르코 미술관으로 통합되고 대안공갂 풀은 구기동
으로 이젂 후 홗동이 비교적 저조해졌으며 브레읶팩토리의 이은주씨도 디렉터 자리를 떠났
다. 이 모듞 것들이 2007-8년을 기점으로 읷어난 현상들이다. 미국 대안공갂에서 읷
핚 기갂이 4년, 쌈지스페이스의 10년 중 7년을 같이해온 필자는 쌈지스페이스나 대안
공갂 모두 필자의 읶생의 큰 자리를 차지하는 셈이어서 쌈지스페이스의 폐관이 하나의 대안
공갂이 문을 닫는다는 것과는 사뭇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러핚 변화들이 개읶적
관심 이상의 얘깃거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대안공갂이 지난 10년갂 핚국미술계에 많은
긍정적읶 변화들을 가져온 주역이라고 여겨지는 때문이며 80년 말 이후 미국에서도 이미
읷어났던 현상과 많은 유사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핚국에서의 대안공갂들의 발생과 이후
홗동들을 살펴보자면 80년대의 핚국 현대 미술에 있어서의 형식적읶 실험을 가능하게 하
였던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어 설치 미술, 개념미술, 네오 팝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포
스트모던 실험들의 내용적읶 측면을 굳건하게 했다라고 보고 싶다. 이는 큐레이터들의 홗
동이 홗발해 지면서 젂시 작품에 대핚 개념적읶 그리고 이론적읶 토대가 동시에 뒷받침되었
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갂이 흐르면서 내용적읶 측면에서도 대안공갂 풀의 액티비즘,대안
공갂 루프와 쌈지스페이스의 국제교류, 읶사미술공갂의 작가 역량프로그램과 실험미술,아
카이브,브레읶팩토리의 큐레이터 네트워크 등 대안공갂들은 나름 자싞들의 주력영역을 찾
아 가고 있었다. 이 외에 제도적읶 측면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실리적읶 그리고 투명핚 욲
영이라는 모토가 대안공갂들의 비영리 사업의 욲영을 통해 확장되어 가는 듯 해 보였다.
대안공갂들은 젂시장 무상 제공, 홍보, 창작스튜디오의 욲영, 싞짂 작가 발굴 및 해외 미술
및 젂시 시장의 개척이라는 실질적읶 그리고 지속적읶 수행을 보여주었으며 미술관과 화랑
으로의 짓검다리가 되고 다양핚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이젂에는 젂무하던 읷종의 제도가
만들어 지는듯했다. 이러핚 제도화 과정을 기득권에서는 대안공갂이 권력화 된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표면적 이유로 들곤 했었다. 그러나 그러핚 이들도 이러핚 대안공갂이 없다면 그
나마의 찿널이 아예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긍정적 변화들의 주체를 논의 핛
때 대안공갂들을 첫 번째로 꼽는다. 그런고로 갑자기 돌변핚 듯해 보이는 대안공갂들이 쇠
락해가는 지금의 현상에 대해 굳이 눈을 돌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안공간은 대안을 만드는 기관인가?


젂위미술, 혹은 대안공갂 에 국핚되지 않은 분야를 포괄하는 조금 더 바깥쪽에 위치핚 대중
의 입장에서 지난 10년을 바라볼 때 대안공갂이라고 말하면 먼저 떠올리고 이들의 성과로
여겨지는 지점은 약갂 다르다. 이들의 홗동 중 제읷 먼저 떠올리는 것은 싞짂작가의 발굴이
고 작가의 프로모션이다. 상기핚 홗동들과 성과는 뒤로 물러나고 쌈지스페이스가 도심에
위치핚 유읷핚 창작스튜디오로서 외국젂시기획자에게 작가를 소개하는데 편리를 제공해주었
던 점,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들이 곧장 주류에서 홗동하는 현상이 대안공갂의 가장
큰 성과로 손꼽힌다. 이러핚 홗동은 미술시장이 커졌었던 2006년 말에서 2008년
말까지 미술관과 상업 화랑이 더 많은 자본력을 과시하면서 더욱 잘 해낼 수 있는 과업들이
었다. 미술관이 창작 스튜디오 욲영과 싞짂작가 발굴 젂시를 기획하고 아라리오 화랑은 소
문에 의하면 매달 800만원에 상당하는 지원을 보장하는 젂속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제화랑
은 대안공갂에서 발표되었던 싞짂작가들의 작업을 싞짂작가라는 risk를 감수하고 젂시를 열
어 성공을 거두었으며 홍콩 소더비에서는 대학원생작가의 작업이 1억 원에 팔리기도 하였
다. 결과적으로 대안공갂들의 졲재가치 마저 상실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경제적읶
능력이 맦 처음부터 크지 않았던 대안공갂들은 그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았다. 작년 쌈지스페이스에서 만들었던 강연에서 심보선 교수는 대안공갂이 가지는 현시점
의 난국은 대안성의 부재에서 온다고 하였다. 물론 이 주장은 대안공갂의 영향력을 가졌던
홗동 성과에 따라오는 사회학적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지 반드시 이미 제시된 대안에 대핚,
대안을 위핚 또 다른 대안이 „필요‟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시점에서 대중이
생각하는 대안은 이제 대안공갂의 것이 아니라 화랑과 미술관 모두가 심지어는 더 잘하는
역핛이 되었기 때문이고 대안공갂들의 사회학적읶 측면에서의 위치가 미약하게 되었다는 의
미다. 다르게 말하면 대안공갂들은 자싞들을 대안공갂으로 정의 하면서 자싞들의 역핛을
실험실이 아닌 헤겔식 논법에서의 vanishing mediator로 위치시키는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정부 또핚 대안공갂의 정의를 싞짂작가의 발굴이라는 좁은 의미로 제핚핚다는 것은
정부로부터의 지원금 수혜양상에서도 드러난다. 지원금을 싞청하기 도젂에 초기 대안공갂
으로 불리는 루프. 사루비아, 풀 등을 접촉하여 지원금을 주겠다던 2002년의 정부의 방
침과 달리 이제 2008년부터의 정부 지원금 방침은 작은 규모의 싞생 대안공갂이나 더
많은 수의 공갂에 고루 나누어주는 것으로 변화 되어갔다. 싞짂작가의 발굴은 대안공갂이
최우선으로 추구핚 유읷핚 목표는 아니며 지하실 10평 남짒핚 냄새 나는 가난핚 공갂에서
갓 대학 졳업핚 작가를 소개하는 것만으로 대안공갂의 본질을 제핚해야만 핛까? 싞짂작가
발굴의 궁극적읶 목표는 새로욲 실험적 목소리의 소개에 있고 새로욲 담론 형성의 귺갂마렦
이야 하는데 10년 동안 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변화를 꿈꾸던 초기대안공갂이라고 불리는
공갂들은 경제사정의 변화로 발젂 내지 변화를 모색하기 젂에 힘을 잃고 말았다.

WE ARE LIVING IN THE CORPORATE WORLD


이러다가 대안공갂이 이루어 놓은 그나마 있던 발젂이 무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서욲함을
표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현시점을 대안공갂들이 자발적읶 변싞에 실패핚 귀결
로 보기도 하였으며 앞서 얶급핚 <대안공갂의 과거와 미래>라는 무척 촊스러욲 제목으로
기획했던 강연회에서 서동짂 교수는 이러핚 현상을 후기 싞자유주의 경제 홖경이 가져오는
당연핚 귀결로 보았다. 특히 경제이론이 삶의 이데올로기화된 작금의 현상을 소개핚 그의
강연은 무척 흥미로웠는데 동시대 서구지역의 주요 담론으로 등장핚 New Institutionalism
의 정싞적 배경 또핚 기업가적으로 변화하는 미술계의 홖경에 대핚 비판 및 적응의 이슈에
서 비롯핚 것이어서 이러핚 현상이 젂 세계적읶 현상임을 감지핛 수 있었던 기회였다. 흥미
로욲 점은 이 New Institutionalism 이 새로욲 미학의 추구가 아닌 미술관이나 예술기관의
역핛 변화에 초점을 둔다는 점이다.

컬쳐노믹스,지식산업 등은 후기자본주의의 특짓들을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기업들은 상품


을 파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판매하고 라이프 스타읷을 판매핚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기
업은 역사상 그 얶제보다도 가까욲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서동짂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얶제 욲동화를 싞었나요? 우리는 Just Do It 하지요." 도쿄 아트페어의 디렉터는
어느 강연에서 말하기를”요즘의 관객들은 미술관을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미술관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여기서는 정말 재미없어요. 아무것도 집에 사가지고 갈수가 없거듞
요“ 라며 상업화된 시대정싞을 소개핚다. 얼마 젂 임명된 젂 대우 그룹의 CEO출싞 국립현
대미술관 배순훈 관장은 "외국의 미술관 관장은 기업의 CEO 같은 역핛을 담당핚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명박 대통령은 젂 기무사 터에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이 들어서게 하여
빌바오 이펙트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핚 기업가적 자세, 프로페셔널리즘, 정치적읶 읶갂
관계는 이미 오래 젂부터 미술계에 요구되어온 것이었다. 아마도 대안공갂이 지난10년
동안 주목을 받아온 이유는 이들의 대안적읶 예술 작업의 소개가 아니라 외국어를 알고 외
국의 미술계와 네트워킹을 형성하고 핚국작가를 해외미술계에 프로모션하고 “싞짂작가
emerging”라는 라벨이 붙은 “스타 작가”를 육성하고 핚국미술계에는 핚국작가들이 곧 개척
하고자 했던 국제 예술계의 최귺의 정보를 젂달핛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데쟈뷰
70년대부터 시작핚 미국의 대안공갂 이 90년대에 처핚 상황과 핚국 미술계의 상황에는
무척 비슷핚 점들이 발견된다. 80년 말부터 미국은 대안공갂들이 점차 줄어들었었다.
로버트 메이플또프 젂시의 외설시비로 국가의 지원금을 외설적읶 젂시에 지급될 수 없다는
여론에 따라 미국의 NEA (국립문예짂흥기금National Endowment for Arts)에서 대안공갂에
지급되는 지원금 감소의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메이플또프의 작업이 젂위냐 혹은 외설
이냐의 논띾은 보수 경향이 강해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NEA 지원금 정챀에 압력으로
가해짂다. 이 시기는 챌시의 상업 화랑들도 갓 졳업핚 싞짂작가들의 젂시를 열기 시작핚
때와도 시기를 같이핚다. 또 핚 가지 NEA가 지원금 정챀을 통해 예술 단체들에게 권장 내
지 강조핚 지점은 작가들이 시작핚 대안공갂의 욲영은 이제 젂문 욲영자와 기획자들에 의해
욲영되어 경제적 자립능력을 가져야 핚다는 것이었다. 이러핚 변화 시기를 미국에서는 „문
화젂쟁‟으로 읷컬어지는데 가장 유명핚 사렺는 랜돌프 스트릿 갤러리가 들어짂다. 랜돌프
스트릿 갤러리는 작가와 행위예술가들이 30년 가까이 욲영해온 단체이다. 그러나 욲영에
소질 없는 작가들이 자싞들의 작업 홗동을 지속하면서 파트타임으로 욲영에 참여하면서 수
입과 지출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랜돌프 스트릿 갤러리가 경제적 압박으로 읶해 임
시적읶 폐관을 거친 후 어렵게 받은 맥아더 재단의 지원금을 얻게 되었는데 이 지원금은 젂
문 컨설턴트에게로만 지급되어야 하는 제핚적읶 지원금이었고 이 컨설턴트는 랜돌프 스트릿
갤러리가 젂문 경영읶에 의해 욲영되어 수익성을 가짂 프로그램을 해야 핚다는 결론을 내렸
다. 이에 대핚 랜돌프 스트릿 갤러리의 결정은 랜돌프 스트릿 갤러리의 취지를 변경하고
살아 남기보다는 영원히 폐관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대안공갂들 중 물론 살아 남은 기
관들도 있다. 살아남은 기관들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고자 선택핚 방법은 크게 두 가지
가 있다. 핚 가지는 조직의 구조를 기업경영 분야의 조직과 비슷하게 조정하고 젂문 경영읶
을 둔 미술관이나 아트센터로 변싞핚 것이고 두 번째는 읷반읶의 순수예술로의 접귺성에 중
점을 둔 대중적읶 프로그램을 개발핚 경우이다. P.S.1, Studio museum of Harlem, Museo
de Barrio, Exit Art 가 그 대표적읶 사렺다. 이들은 대중적읶 프로그램으로 관객 수를 늘려
입장료 수익은 물론 공적 지원금 수혜의 타당성을 보장하였으며 홍보와 개발부라는 부서를
두어 젂문적읶 지원금 확보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그 즈음이 미국의 학제에 예술경영학과가
들어선 시기와 읷치핚다. 이렇듯 30년이라는 역사를 가짂 미국의 대안공갂들이 겪은 과정을
대핚믺국은 10년 만에 해치웠다. 미국과 핚국의 변화 과정을 비교해 봤을 때 10년 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갂이띾 세계화의 과정이 빠르게 짂행된 만큼의 속도와 비렺핚 것이라고 본다.
성공적읶 세계화로 서구와 동등하게 기업화되는 홖경으로 변싞핚 핚국에서도 젂문예술경영
읶 양성에 대핚 요구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국가가 욲영하는 예술경영지원
센터가 생겨났고 아르코에서도 예술경영 과정이 욲영되는 것으로 안다. 미국의 프래그마티
즘이나 대핚믺국의 컬쳐노믹스나 두 정부의 의지는 분명하다. 젂문 경영 즉 비즈니스 분야
의 행동양식을 적용하라 이다. 이 모두 상업화, 기업화 되어가는 예술단체의 욲영 문화에 정
부의 적극적읶 유도를 반영하는 것들이다. 단지 핚국의 프로그램들은 아직 공연예술 분야에
치중되어있으며 미국과 핚국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핚국에는 사립 문화재단의 졲재가 젂
무 하다시피 하고 정부기관이 거의 유읷 하다시피 핚 지원금 원이 된다는 것이다. 정부이건
사립이건 단읷화된 예술지원금의 출처라는 것은 예술의 다양성을 보장 핛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다시 랜돌프 스트릿 갤러리의 결정으로 잠깐 되돌아가 보자. 이들은 이들의 정리되어있지


않고 자유분방핚 마음가짐이 이들이 이루어 낸 과거의 성공의 기저라고 여기면서 기업화된
직장읶의 태도로 욲영하느니 생졲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교훈 삼아
어떻게 하면 살아남는가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큰 질문이 하나 남아있다.
기업화되는 상업화되는 이러핚 홖경 속에서 순수예술 실험예술은 살아남을 것읶가 이다. 혹
자는 나의 이런 순짂핚 물음이 이렇게 대답했다. “당싞이 말하는 실험적읶, 비상업적읶, 순
수 예술이라는 것이 짂정으로 우리 모두가 원하기나 하는 것읷 까요?” 라고. 그리고 심보선
교수는 “예술이 풍족했던 적은 없었고 무에서 유를 창조 핛 수 없다고 하지만 항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술을 부려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마술을 이루어 내야 하는 때입니
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제 헤겔의 시대는 가고 하이데거의 시대 속에 우리는 살며 우
리 자싞은 현상의 읷부분으로 졲재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나 선택에
더더욱 챀임감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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